겸손이 춤출 때 세상이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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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겸손이 춤출 때 세상이 아름다워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지 않을까. 겸손이 주유하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낙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없어도 있는 것보다 더 질서가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상은 향기로 가득 찰 수 있단 말이다. 겸손은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힘도 들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필요 없다. 이렇게도 손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겸손이다. 하지만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것도 겸손이다. 왜 그럴까. 욕심 때문이다. 인간의 가없는 욕심이 겸손을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행사장에를 가봐라. 잔칫집에도. 서로들 윗자리에 앉으려고 난리법석들이지 않던가. 그래야 자신의 권위가 더 빛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사를 하는 것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산행 중 스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반갑게 받아주면서 인사를 되돌려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큰둥한 모습으로 받아먹기만 하고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말할 때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장황설을 늘어놓지만 타인이 말하면 금방 시들하며 조는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는 존칭을 써가며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대충하는 이도 있다. 남의 허물은 좁쌀보다 더 작은 것도 태산처럼 부풀려 동네방네 소문내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좁쌀도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법이 있어도 그 법이 부족할 정도로 혼탁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도덕률과 종교가 있어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와 사찰 등 성전이 생기고 또 생겨도 이 세상의 혼탁함은 결코 맑아지지 않고 더 탁해져 가기만 하는가 보다. 이는 곧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아귀다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정치권 및 경제권에서는 물론 점잖게 문화와 예술을 논한다는 문화계와 예술계에서마저도. 어디 그뿐인가.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종교계는 또 어떤가.
가끔씩 스님들과 신도들이 뒤엉켜 소림사의 결투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사바세계의 욕심이 그대로 사찰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대대로 상속하기 위해서 또는 신・구세력의 갈등 등으로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다른 곳도 아닌 종교계에서까지 이런 하극상의 행태들이 빚어질 때마다 절망을 봐야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보통 인간들의 그것들보다 더 더럽고 추해 보였다. 신을 빙자하면서도 가장 하극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번질번질한 설교를 하면서도. 오죽했으면 목회자 자신들마저도 자신들이 한 설교의 10%만 목회자 자신들이 지켜도 좋은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 했겠는가.
물론 목회자들도 인간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구역질 나는 모습들까지 보여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색이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목회자들이. 만약 이렇게 말하는 세상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차라리 목회자의 길을 벗어나라. 그런 다음 범인들처럼 살아라. 그러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런 부정적인 현상들이 왜 발생하는가. 바로 겸양지덕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되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겸손이 춤출 때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것만은 반드시 명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국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