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 춤출 때 세상이 아름다워 편집국 gwangmae5678@hanmail.net |
2024년 08월 12일(월) 08:50 |
자신이 말할 때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장황설을 늘어놓지만 타인이 말하면 금방 시들하며 조는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는 존칭을 써가며 인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대충하는 이도 있다. 남의 허물은 좁쌀보다 더 작은 것도 태산처럼 부풀려 동네방네 소문내면서도 자신의 큰 허물은 좁쌀도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법이 있어도 그 법이 부족할 정도로 혼탁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도덕률과 종교가 있어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와 사찰 등 성전이 생기고 또 생겨도 이 세상의 혼탁함은 결코 맑아지지 않고 더 탁해져 가기만 하는가 보다. 이는 곧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아귀다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정치권 및 경제권에서는 물론 점잖게 문화와 예술을 논한다는 문화계와 예술계에서마저도. 어디 그뿐인가. 인간의 영혼을 달래주는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종교계는 또 어떤가.
가끔씩 스님들과 신도들이 뒤엉켜 소림사의 결투를 보여주지 않았는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사바세계의 욕심이 그대로 사찰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대대로 상속하기 위해서 또는 신・구세력의 갈등 등으로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다른 곳도 아닌 종교계에서까지 이런 하극상의 행태들이 빚어질 때마다 절망을 봐야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보통 인간들의 그것들보다 더 더럽고 추해 보였다. 신을 빙자하면서도 가장 하극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신자들에게는 번질번질한 설교를 하면서도. 오죽했으면 목회자 자신들마저도 자신들이 한 설교의 10%만 목회자 자신들이 지켜도 좋은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 했겠는가.
물론 목회자들도 인간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구역질 나는 모습들까지 보여줘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색이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목회자들이. 만약 이렇게 말하는 세상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차라리 목회자의 길을 벗어나라. 그런 다음 범인들처럼 살아라. 그러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이런 부정적인 현상들이 왜 발생하는가. 바로 겸양지덕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되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의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겸손이 춤출 때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것만은 반드시 명심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편집국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