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에서 자라는 고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먹을 만큼만 채취했던 것이다. 때문에 늘 자연이 풍부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역시 마찬가지다. 탐욕스런 백인들이 총 들고 들어와 살육전을 벌이며 땅 싸움을 하기 전까지는 아메리카 대륙은 평온했다. 개인 소유의 땅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게 풍부했다. 저녁 찬거리가 필요하면 전사 한 두 명이 나가서 화살로 적당한 짐승 한 마리 잡아 오면 끝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맑았다. 모든 산하가 아름다운 정령으로 그득 찼다. 우리네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문명의 찌꺼기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십시일반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이에는 혈족 여부도 가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거지들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극빈자나 거지들은 마을 사람들의 생일, 제삿날까지 알고 지냈다고 한다. 음식물을 얻어먹기 위해서. 정작 당사자는 모르고 지나칠 뻔할 때도 그들은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 장만하는 기척이 보이지 않으면 알려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비록 물질적 풍요는 지금과 같지 않았더라도 정신적 풍요는 훨씬 더 컸던 것이다. 그래서 정신적 삶의 질은 지금보다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모두가 아우성이다.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망나니 춤을 추고 있다. 현재의 정치권을 봐라. 인간의 꼴이 아니다. 마치 아귀들의 난장판 같다.
겉으로는 번드르한 말을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다. 뺀질거리는 꼴은 기름 장사 손가락 같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집에 들어가서 자녀들 얼굴은 어떻게 보느냐고. 어린 손자들은 어떻게 대하느냐고. 하기야 그런 양심 있으면 그러겠는가. 아무리 재물을, 권력을 많이 가져도 그들의 얼굴에는 행복이 감돌지 않는다. 무한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이 떠날 날이 없는 것이다. 사실 고통은 꼭 필요하다. 허리에 극한 통증이 온다고 강력한 진통제만 쓸 수 있는가. 만약 그런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허리가 망가져 버릴 것이다. 고통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무통증은 곧 함부로 허리를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자께서는 어딘가가 좋지 않으면 통증이라는 고통을 준 것이다. 빨리 알아차려 적절한 대처를 취하라고. 배고픔이라는 고통이 없으면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배고픔이라는 고통을 주어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다. 원하는 권력이나 재물을 못 가져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고통이 주는 의미를.
임성욱 박사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