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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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좋은 이미지를 형성하려면

문득 마르틴 부버가 생각난다.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 '나와 그것의 관계', '그것과 그것의 관계'로 나눠서 설명했다. 먼저 '나와 너의 관계'다. '나'와 '너' 모두가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는 단계다. 가장 바람직한 현상이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는 화원의 세상이다. 그야말로 살맛나는. 두 번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다.
나는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는데 상대방은 나를 물건으로 보는 관계다. 때문에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최선을 다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이용가치여부에 따라 대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용가치가 없으면 가차 없이 버려버린다. 그냥 버리기만 해도 괜찮다. 아예 각종 악담을 담은 누명까지 씌워서 버린다. 자신의 탐욕에 의해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 상관도 없는 상대방을 탓한다. 잘못된 것은 모두 '네 탓'이라고. 처참한 광경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런데 정작 악행을 일삼는 당사자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지막으로 그것과 그것의 관계다. 이 경우는 피차간에 애초부터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물건으로만 여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린다. 인생막장이다. 이런 관계가 심화될수록 우리사회는 아귀의 세상이 되어갈 것이다.
우선은 자신이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그 피해는 모두가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적인 방향으로 형성된 사회 속에서 악행 하는 자 자신은 물론 그 가족까지도 살기 때문이다. 사회가 험악해질수록 그로인해 형성된 질환자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들은 불특정 다수인들을 향해 각종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은 선으로 돌고 악은 악으로 돌 수밖에 없다. 때문에 피차간에 불필요한 욕심은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나와 너의 관계'일지라도 '그것과 그것의 관계'로 전락되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왜 어부를 불렀을까. 어부는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이다.
갈릴래아 호수도 자기 것이 아니고, 그 안의 물고기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잡기 전까지는. 여하튼 먼저 그물을 버렸다. 그 다음에는 배를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가족을 버렸다. 물론 그렇게 다 버렸으면서도 수없이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배반했다. 인간적인 욕망을 모두 잠재울 수는 없었기 때문일까. 현존하는 예수시대에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보이지 않는 예수 시대인 오늘날은 어떻겠는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지녀야 될 최소한의 도만은 지켜야 되지 않을까.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덤터기 씌우지 않기',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네 탓 않기',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않기', '자신은 베풀지 않으면서 무한정 상대방이 해주기만을 바라지 않기', '없는데서 상대방 험담하지 않기', 등이라도. 모로코 속담에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첫째는 험담하는 자, 두 번째는 험담을 듣는 자, 세 번째로는 험담의 대상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가 험담이나 중상모략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험담은 머릿속에 있을 때는 자신이 조종할 수 있지만 세치 혀를 통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는 그 말이 자기 자신을 조종한다. 때문에 신중히 처신해야 한다. 선의 선순환구조를 형성해 보자. 칭찬하고 사랑하는 말을 자주하면 좋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인생. 예쁘고 향기롭게 꾸며가 보면 어떨까.




▲시인, 사회복지학박사
임성욱 박사
임성욱 박사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