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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스로는 양명자(陽明子)라 칭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를 '양명 선생'이라 불렀던 것이다.
명나라 헌종 때에 절강성 소흥부에서 태어난 양명은 명필 왕희지의 후예였다. 왕희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예가로서 길을 걸어갈 때나 앉아서 쉴 때나 언제나 손가락으로 붓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손가락으로 옷에다가 한 획 한 획 그려보곤 했는데, 나중에는 옷이 닳아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 또 붓글씨 연습을 끝낸 후에는 붓과 벼루를 집 앞에 있는 연못에서 씻곤 했는데, 나중에는 그 연못물이 다 검어졌다고도 한다.
왕양명의 아버지 화(華)는 진사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남경이부상서(오늘날 장·차관급)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양명은 그 어머니가 임신 8개월 만에 조산(早産)했기 때문에, 몸이 약해 이미 청년기에 폐병으로 피를 토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양명의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 7월, 결혼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결혼식이 있던 날, 그는 혼자서 부근의 철주궁(일종의 도교사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 도사 한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호기심에 이끌린 그는 그 도사에게 물어보았다.
"병에 걸리지 않고 오래 사는 방법, 즉 양생(養生-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노력함)이 무엇입니까?"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 그것을 배우느라 집에 돌아갈 일도 잊고 말았다. 화려한 신방에서 아름다운 신부와 함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내야 할 신랑이 결국 생면부지(生面不知-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의 도사와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또 그가 입산(入山)하려고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있다고 전해진다. 즉, 양명은 스무 살에 향시(鄕試-과거 시험에서의 제1차 관문. 여기에 합격하여야 회시에 응시할 수 있고, 이 회시에 합격하여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음)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4년 후에 응시하였으나 또 떨어졌다. 자신의 재주만을 믿고 남을 가볍게 여긴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마침 폐병에 걸렸고, 그리하여 산 속에 들어가 양생법을 공부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양명의 나이 56세 때에는 광서 지역에서 야만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곳 총독이 이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양명을 총독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양명은 이 무렵 폐병에 이질(痢疾)까지 겹쳐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양명은 할 수 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서로 향했다. 양명이 그곳에 도착하자, 반란군은 지레 겁을 먹고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의 반항이 그곳 관리들의 악정(惡政-악독한 정치) 탓임을 알게 된 양명은 태장(笞杖-작고 가는 가시나무 회초리로 볼기를 치는 형벌. 이에 반해, 큰 형장으로 볼기를 치던 형벌은 '장형'이라 부름) 100 대씩으로 다스려 그 죄를 벗게 해 주었다. 또한 그는 학교를 세워 교육과 교화에도 힘썼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은 데다 과로까지 겹쳐, 양명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도적 떼를 몇 번이나 토벌하고 난을 평정하는 동안 양명의 기력은 모두 소모되고 말았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날 때부터 선병질(腺病質-결핵성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증세)인 데다 더욱이 학문과 사색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몸이 더욱 허약해져 결국 몸에서 피를 토하는 각혈병(咯血病-폐나 기관지점막 등에서 피를 토하는 병)을 얻고 말았다.
▲광주교대명예교수, 철학박사
유튜브'강성률철학티비'개설
강성률 교수
강성률 교수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