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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언제, 누구에게 그랬는지를 모를 정도다. 오히려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정상적인 음식 값도 깎는다. 직원들의 복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급여도 빈약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정상적으로 지급해야 할 수당도 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닦달한다. 성과가 오르지 않으면 해고한다고. 잘하는 직원도 내키지 않으면 역시 해고다. 얼마든지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갑의 횡포다. 만용이다. 하지만 특수직에서까지 갑질을 하면 곤란하다. 유능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글을 쓰는 분야는 더욱 그렇다. 누구나 글을 잘 쓸 수는 없다. 박학다식하다고 해서 잘 쓰는 것도 아니다. 구술이 세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그렇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견문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잘 꿰어야 한다. 잘 꿸수록 구슬은 빛난다. 그러지 않으면 쓰레기만도 못하다.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갑질이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이런 갑한테는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그 주변인들 역시 평생 빌붙어 살 쓰레기들인 경우가 많다. 보신에만 연연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갑의 횡포는 더 심해지고 을은 더더욱 초라해지는 것이다. 참으로 구역질 나는 참상만 전개될 뿐이다. 그렇게 쓰레기들의 행진만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문제가 상존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갑도, 을도 비우지 않기 때문이다.
갑은 욕심을 비우고, 을은 비열함을 비워야 하는데도. 피차간에 배려와 소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계도, 관계도, 재계도, 문화계도, 언론계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겉모습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오면서 엄청나게 변했어도 그 내면의 세계는 역시다. 때문에 수천 년 전에 쓰여 졌던 경전이 오늘날에도 역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성경이 그렇고, 불경이 그렇다. 사상가들의 글들이 그렇다. 에니어그램 등 성격풀이들이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인간의 근본은 별로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커다란 업보라 할 수 있는 욕심보 때문일 것이다. 자자, 이제 좀 변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정신세계부터 구조조정 해야 하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인류생성 시부터 형성된 업보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신이 아니다. 때문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세상을 보드랍게 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기할 수 있다. 예수의 제자들을 보라. 제자가 되기 위해 어부 베드로는 생계수단인 그물을 던져 버렸다. 야고보나 요한은 자신들의 울타리인 아버지와 삯꾼들을 버렸다. 버리지 않았으면 편안하게 살았을 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었기에 예수에 대한 배신도 거듭했다.
하지만 근본만은 변하지 않았다. 예수를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 말이다. ‘갑’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여! 추악한 욕심보를 버려라. ‘을’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여! 비열한 생각을 버려라. 그래야 세상이 변한다. 그것이 곧 모두가 잘 사는 길이다.
임성욱 박사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