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편한 옷을 입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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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신에게 편한 옷을 입고 살아가자

도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까지 수많은 수행자들이 찾아 나섰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도를 찾았다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그 시대적 상황과 환경만 다를 뿐 여전히 혼탁하다. 수행자들의 도력이 부족해서일까. 도를 찾기 위해 승려들은 종종 술판을 벌이면서 난장판을 칠까. 때로는 정권의 음습함과 결탁해 반대파 승려를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몰아대기도 했을까. 그들과 짝짜꿍하면서 일부 승려와 못된 일들을 벌였다고 공격받았던 주인공 중의 한 사람. 상대 진영이 거짓말한다고 공격했다. 그리고 시장이 되었다.
선거기간이 짧았기에 일단 부정부터 해놓고 이기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그랬을까. 모를 일이다.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 코로나19가 난무하고 있음에도 정부의 정책에 반해가면서까지 종교 행사를 가지는 진짜 이유는 뭘까. 학력도 불분명한 어떤 목사는 광화문 등을 누비면서 악을 써댔다. 시정잡배도 입에 담지 못할 저질 말들도 세 치 혀를 통해 여과 없이 세상에 뿌려댔다. 천주교 일부 사제들은 무거운 하느님 말씀을 구현하기 위해 권위주의적일 때도 있을까.
어떤 경우는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른 견해를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종교란 무엇인가. 힘들고 슬픈 일을 당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가 아니던가. 그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을 때, 오히려 억압하고 비난하면서 올가미까지 씌어갈 때 이를 털어놓기라도 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교회이고, 성당이고, 사원이 아니던가.
그런데 일부 교회, 사원 등은 그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스님은 산사에서 수행할 목적이 아니면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인간은 자고로 쓰여질 곳이 있다. 수행자로, 장사치로, 관리로, 정치인으로, 의료인 등으로.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이 본인에게나 타인을 위해서나 이롭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은 물론 그가 소속된 사회까지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행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본다. 범인들은 결코 수행자가 되기 어렵다.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인고의 세월을 견뎌가며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으면 수행처를 떠나야 한다. 괜히 수행 흉내나 내고 있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는 꼭 산중에 묻혀 고상한 척만 해야 깨닫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다. 신라 시대의 원효대사. 지극히 평범한 곳에서 득도하지 않았던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던 중,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심한 갈증에 고인 물을 마셨다. 그리도 시원하고 맛있었다. 다음날 보니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서 구역질하던 순간 깨달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 사물 자체에는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저잣거리로 나가 대중교화에 앞장섰다고 한다. 물론 증명할 길은 없다. 중 일연의 <삼국유사>'원효불기조'에도 이 같은 장면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고집부리지 말고 편한 옷을 입고서 살아가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득도이지 않을까. 특히 수도자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그래서 더욱 그렇다.



시인,사회복지학 박사
임성욱 박사
임성욱 박사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