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묘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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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참으로 오묘한 인연

인연이란 무엇일까. 맺어왔던 인연이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은 또 다른 인연이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와 너울성 파도를 치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은가. 불교에서는 인(因)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緣)은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이라 했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이 합해져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고 했다. 인간은 여자와 남자로 형성되었다. 이중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인류는 멸종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여자도 남자도 모두 소중한 것이다.
21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여자는 비교하위로 생각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 독일)는 여자에 대한 인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19세기 중후반에 태어났다. 특히 여자에게 자유와 예술의 문이 폐쇄적이던 19세기 말임에도 자신의 주관을 확립해가면서 표현주의 화가로 자리매김했었다.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 클레,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 등과 함께 혁신적인 미술운동 모임인 청기사파(Der Blaue Reiter)를 조직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칸딘스키의 힘도 컸다고 볼 수 있다.
뮌터가 청기사파에서 활동하기 휠씬 전인 1902년 뮌헨의 팔랑크스 미술학교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이때 입학한 지 채 1년도 안 돼서 바실리 칸딘스키의 문하생이자 연인이 되어 1908년 알프스가 바라보이는 독일의 무르나우에 정착할 때까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여기에서 1914년까지 함께 똬리를 틀었다. 이때 유부남인 칸딘스키는 이혼을 약속했다. 뮌터도 실질적인 아내 역할을 했었고. 본래 뮌터는 독일 중상류층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런데 부친은 뮌터가 9세 때 사망했다. 21세 때는 모친까지 사망했다. 하지만 상속재산이 많았기에 미술교육 등을 받으면서 자유분방하고도 부유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칸딘스키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독일에서 쫓겨나 유럽을 유랑하다가 혁명이 일어난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 버렸다. 이때 이혼도 했다. 하지만 재혼 대상은 뮌터가 아니었다. 뮌터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운 러시아 미녀였다.
이후 독일로 되돌아와 활동하면서도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리는 뮌터에게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참으로 후안무치의 극치가 아닌가. 더더욱 치사한 것은 칸딘스키가 옛집에 남겨둔 그림의 반환까지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변호사를 통해서.
이에 뮌터는 "도덕적 보상"을 주장하면서 반환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작품들의 일부만 차지했다. 그런데 뮌터가 돌려주지 않고 무르나우 집 지하실 깊이 숨겨 보호한 덕에 칸딘스키 초기 작품 상당수가 나치의 문화 탄압 정책을 비켜 갈 수 있었다. 뮌터는 80세가 되던 1957년 자신의 비밀 컬렉션을 통째로 뮌헨시에 기증했다. 표현주의 회화의 보고가 된 렌바흐하우스(Lenbachhaus)라는 미술관의 탄생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칸딘스키와 결별 후 은둔했던 집 역시 함께 살았던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했다. "뮌터 하우스"라는 명칭으로. 변해버린 사랑의 배신자 칸딘스키는 화풍도 변했다. 하지만 뮌터의 화풍은 여전했다. 뮌터가 그린 말(馬)은 뒤돌아봄 없이 여전히 한 방향으로만 달렸다. 뮌터는 한때 행복했던 시절을 여전히 가슴 깊이 사랑했던 것이 아닐까. 잊지 않은 채 가슴속에 소중히 보관하면서. 칸딘스키는 자신을 버렸지만. 누가 인생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가꾼 자일까. 참으로 오묘한 인연이 아닌가.




▲시인, 사회복지학박사
임성욱 박사
임성욱 박사 gwangmae56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