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들의 출생 신분(6)-러셀 편집국 gwangmae5678@hanmail.net |
2024년 09월 02일(월) 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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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토리당이 지주(地主) 계층을 정권의 지지 기반으로 삼는 데 반하여, 휘그당은 자유주의 무역에 종사하는 부르주아들을 힘의 근거지로 삼는 진보 정당이었다. 러셀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이 집안의 자유주의적 성격은 최고점에 이르렀다. 러셀의 할아버지 존 러셀은 1813년 휘그당 소속의 하원의원이 된 이래 내무장관과 외무장관, 추밀원(국왕의 정치 자문기관. 법원을 감독하고, 회계청 재정을 관리하며, 지방 행정조직을 조정하는 등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더욱이 두 차례나 총리를 지냈다. 그는 그야말로 자유주의적 정치가의 대표자로, 심사율(국가가 지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공직을 가질 수 없도록 규정한 법률)을 없앴을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넓히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제1차 선거법 개정법안을 만들고, 곡물법(외국산 밀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 이 때문에 소비자들은 풍, 흉작에 관계없이 비싼 빵을 사먹어야 했음)을 없애는 데에도 앞장 섰다. 이러한 공로로 1861년에는 백작(귀족의 5계급 중 후작 다음 가는 작위. 고려시대에는 왕의 사위에게, 조선 초기에는 정1품 공신들에게 주어졌음. 을사오적으로 잘 알려진 이완용 등이 이 직위를 받았음) 작위를 받았다.
러셀의 아버지 또한 공리주의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과 친구 사이였으며, 이 밀은 나중에 러셀의 대부(代父, 신앙의 증인으로 세우는 종교상의 남자 후견인)가 되었다. 그러나 러셀의 부모는 매우 극단적이고도 특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와 자신의 아내(러셀의 어머니) 사이의 정사(情事, 섹스)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정도였으며, 또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러셀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뒤에 남겨진 러셀은 할아버지 집에서 자라야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러셀의 어린 시절 교육은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매우 진보적인 할머니는 다윈 사상('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진화론)과 더불어 사회 정의에 대한 개념을 손자에게 물려주었다. 또한 그녀는 영국의 공교육에 반대하여 손자를 학교에 보내는 대신, 가정교사를 집으로 초빙해 가르쳤다. 이 때문에 러셀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매우 고독한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 러셀은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어 실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든 선조들의 진보적인 가풍을 물려받은 러셀은 그 역시 진보주의적 철학자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선거법 개정과 계약결혼(기간이나 의무 등을 미리 정해 놓고 하는 동거)과 같은 혁신적인 주장은 러셀 가문에서 처음 나왔다.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유튜브 '강성률'철학박사TV' 개설
강성률 교수
편집국 gwangmae5678@hanmail.net